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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와 세계시민주의 by ok_com

한겨레 기사 링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4511.html
[청춘상담앱] 반장 하면 ‘반기문’ 되기 유리하냐고요?
‘글로벌 리더’ 꿈 좇는 청춘들에게 던지는 한비야 세계시민학교장의 일침


한비야가 '세계시민학교'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세계시민학교라는 것이 실제 학교는 아니고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에서 매년 실시하는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이란다. 한비야가 그 중 한국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말들 중에 함께 논해보고 싶은 부분을 아래에 옮긴다.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세계시민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세운 학교예요. .. 우리 집, 우리나라의 틀에서 벗어나 전세계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자세가 바로 세계시민의 자세죠." 
"지금 당장 내가 아껴 쓴 물이 곧바로 아프리카로 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물이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에 아껴 쓴다는 생각을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발을 움직여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순간 세계가 우리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10년 전 월드비전에서 구호활동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우리도 힘든데 왜 남의 나라를 돕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10년 만에 정말 많이 변했죠. .. 제가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이 됐을 때는 그저 개인적인 차원의 성공으로만 여기던 이들도 세계시민학교장 취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기뻐해줘요. 진정성, 그 바탕이 되는 사랑에 대해 다들 공감하는 거라 생각해요. 저는 세계시민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 리더가 됐을 때 정말 좋은 세상이 될 거라 믿어요. 그런 이들을 배출하는 학교로 키우고 싶습니다."



한국 청년들 사이에 한비야 열풍이 불던 때에도 찝찝한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한비야의 인터뷰 기사가 새로 나왔고, 지금 쓰고 있는 논문과도 관련된 것이라 이렇게 글로 쓰게 되었다. 나는 무엇이 찝찝했던 걸까. 


1. 세계무대에 대한 집착

가장 먼저는 한비야의 직업을 '글로벌 리더'라든가 그녀가 직접 언급한 대로 '성공'과 연결지어 평가하는 분위기가 이상스럽다. 한비야 자신도 위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이 국제무대에서 일하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만 생각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뒤이어 오는 말들을 보면 이 말의 뜻은 본인의 일(국제구호활동)이 '엘리트 코스를 밟고 대단한 스펙을 갖춰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보단 진정성이 필요한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자신을 향한 뜨거운 찬사를 모를 리 없으니 스스로도 표현이 잘 안 되는 당혹스러움을 담은 말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미가 꼭 함축돼있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NGO 국제구호활동을 '국제무대에서 일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소개하는 게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세계무대'라는 말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특별한 뉘앙스를 고려하면 이런 표현은 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누군가 세계무대에서 활동한다는 말은 그 사람이 크게 성공했다는 의미로 통한다. 해외에서 일하는 사람을 모두 성공한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그럴리가 있나..) 성공한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세계무대 운운하는 것을 빼먹지 않는단 이야기다. 가령 그리스나 이탈리아의 젊은 박사가 자국의 실업난을 피해 프랑스 대학에서 연구직을 얻는다고 해서 고국 사람들이 그들을 '세계적 지성'이라며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우리가 해외 유수 대학의 한국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 차이를 이해하기 쉽다. 단지 미국 아이비리그의 학문 수준이 한국 학계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누군가는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믿을 수 없는 만큼 많은 사립대학이 허가를 받고 (정)교수의 높은 사회적 지위가 옹호되는 한국이건만 정작 학문과 학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대가 없다는 반응으로만 보인다.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은 언제나 세계무대에 있기 마련이라는 전형적인 사고가 바탕된 것은 아닐까. 반기문 취임 이후 유엔총장의 직책을 세계대통령이라 말하길 즐기고 미국 로스쿨 출신의 미국변호사는 아예 국제변호사로 불러주고 있는 상황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NGO 활동을 한국이라는 좁은 무대를 벗어난 행군이자 도전이라고 자꾸만 설명하는 것에도 특별한 뉘앙스가 담길 수밖에 없다. 한비야 본인이 '젊은이들의 거창한 오해'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녀 말대로 우리나라 힘들어도 남의 나라 물론 도와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국경을 넘어 더 넓은 반경 속에서 구호활동을 벌였다고 해서 국제적이지는 못한 활동들보다 더 대단한 일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2. 글로벌 리더 추앙

한편 큰 희생과 위험성이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당사자의 표현대로 희망을 꿈꿀 겨를도 없이 지치기 쉬운 일이 국제구호활동이건만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녀의 행보를 우러러 보는 것일까? 한비야가 자평하듯 '바탕이 되는 큰 사랑'이 사회적 공감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단 월드비전이 다루는 이슈들이 국내에 별 공감과 반향을 끌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한비야를 평가하는 초점은 예외 없이 그녀가 국제기구의 팀장이라거나 유엔의 자문위원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지적을 예민하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나는 그녀가 '세계무대'에서 주요한(얼마나 주요한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이름이 내걸리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면 지금만큼의 유명세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도 이처럼 많이 쓰지 못했고 많이 팔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의 대체적인 인식에 따르면 사회적 유명세와 베스트셀러 저자의 위엄이란 성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유형이긴 하지만 한비야는 여전히 세계무대에서 성공한 한국인 리더(또는 그런 이미지)인 셈이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내세우려면 글로벌 리더 정도는 돼줘야 한다. 이제 여기는 안전망이 탄탄한 사회를 다함께 이루고자 희망하고 자신의 고향에서 소신과 재능을 살려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나같은 사람은 호구 취급 받는 사회다. 한비야가 7급 공무원이 꿈이라는 젊은이를 패기 넘치게 때렸다는 고백(위 링크 기사 내용)이 상업적으로 팔리는 사회다.

그런 맥락에서 위 인터뷰 마지막에서 한비야가 국제이슈와 봉사정신이 아닌 리더 교육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가볍게 볼 수 없다. 사실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다. 한비야가 인터뷰에서 언급하듯 구호활동의 현장에서는 초국가기업의 횡포와 군부의 폭력성을 절절히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백날 책이나 논문을 들여다 보아도 나보다 한비야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현실이다. 그런데도 한비야가 그와 같은 주제로 쓴 책이나 강연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는 현장의 경험을 통해 리더의 힘과 중요성을 가장 크게 실감하였고 그래서 좋은 의식을 갖춘 리더를 키워내는 데 자신의 전력을 쏟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글로벌 리더'에 대한 최근 한국사회의 출세주의와 전략적으로 손을 잡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게 비단 전략만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위 인터뷰에서 한비야는 "세계시민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 리더가 됐을 때 정말 좋은 세상이 될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리더 교육, 이게 이 사람의 진심이다. 알고 보면 '글로벌 리더'는 한미FTA 옹호진영이 특정한 계층을 향해 줄곧 내세운 마법의 단어다. 대체 어떤 사람이 글로벌 리더일까? 일단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초국가기업의 경영진이나 국제기구의 간부가 떠오르고,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3. 정체가 수상한 세계시민주의

한비야는 이제 자신을 향한 한국사회의 관심을 '세계시민정신'을 고취하는 데 돌리고자 힘쓰겠다고 한다. 유명세를 얻던 초반에는 '도전정신'을 강조하더니 돌연 그게 이렇게 됐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세계무대'에 대한 열띤 호의가 '세계시민'에 대한 관심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으로 보인다만 다행히 논리적으로는 잘 이어지고 있다.) 쭉 즐겨 써온 말이기도 하지만 특히 위 인터뷰에서 한비야는 '세계시민'이란 단어를 자신의 주제어로 삼고 있다. 세계시민은 높은 차원의 도덕성을 연상시켜 어쩐지 우리를 주눅들게 만든다. 학계에도 자국중심적 배타주의(ethnocentric particularism)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가 개념화되어있고 그 원류를 디오게네스와 스토아학파에서 찾거나 칸트의 '목적의 왕국'과 연결짓기도 한다. 말에서 풍기는 고귀한 분위기 그대로 세계시민주의는 모든 인간에 내재된 정의감과 선을 바탕으로 보편적 인간애를 함양하고자 하는 일종의 '도덕원리'로 제창된 것이다. 문제는 세계시민주의가 특정 현실체에 대한 대안을 주장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런 공동체(또는 통치) 형태를 제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한국시민권(여권에 찍히는 국적)은 있지만 세계시민권이란 건 없다. 결국 현실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흔히 세계시민주의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세계시민주의가 맞서는 '자국중심적 배타주의'라는 것도 정체가 묘연하여 자칫 세계시민주의는 애국심이나 국가소속감의 가치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이다.(이런 훈계를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다.) 정치이론이 아니라 도덕원리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다문화주의와 나란한 입장에서 세계시민주의에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문화주의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political correctness)'을 콕 집어 안내해주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세계시민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대개 알려주지 않는다. 한 국가의 시민으로 행동하지 말고 세계의 시민으로 행동하라고? 국가보다 보편적 인권을 선택하라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만약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진심으로 인간애를 발휘했다면 국가와 보편적 인간애 중 어떤 가치를 선택한 것일까? 이건 결코 우문이 아니다. 이 질문에 딱 부러지게 답할 수 없다는 것은 세계시민주의가 비현실적인 대결구도에서 모호한 논의를 요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1994년(그렇다, 무려 18년 전이다!) 정치와 문학 관련 기고문을 싣는 미국의 격월간지 '보스턴 리뷰'에 주목할만한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먼저 철학 및 윤리학자인 마사 너스봄(Martha Nussbaum)이 미국인들의 세계시민주의적 의식을 촉구하는 논조로 보스턴 리뷰에 글(http://bostonreview.net/BR19.5/nussbaum.php )을 실었고, 이후 이 글에 대한 반응으로 각계 15명의 학자들이 같은 지면에 연이어 기고하면서 하나의 포럼이 형성된 것이다. 이 논쟁은 1996년에 책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원제는 'For Love of Country?: Debating the Limits of Patriotism'이며 한국에선 2003년에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한계 논쟁'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당시 논쟁은 세계시민주의가 내세우는 이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정작 이것이 국가공동체와의 대립을 직접적으로 명시하고 있단 사실을 회피해온 상황에서 그간의 침묵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논쟁에 참여한 각 학자의 주장도 흥미로워서 다음 기회에 따로 소개글을 포스팅해보려 한다. 비판적 입장을 한 문장씩 짧게 정리해본다면, '현실적으로 세계시민주의의 이상은 민족국가를 매개할 수밖에 없다', '(세계시민주의를 따로 주창하느니)현존하는 불평등을 타파하고 민주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세력을 지원하는 게 실제로 중요하다', '우리의 일차적 충성대상은 민족공동체도 인류공동체도 아니고(다시 말해 이렇게 둘로 나눌 것이 아니고)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 돼야 한다',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는 자국중심주의나 구체적 충성대상을 무시하는 세계시민주의 모두 비도덕적 행위를 유발할 위험이 있다', '세계시민주의에는 다소 영웅적 요소가 있다(나의 해석으로는 일종의 오지랖)'는 의견들이었다. 모두 중요한 지적이다. 나의 짧은 감상으로는 세계시민주의가 애초에 잘못된 논의형태를 취했다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 못지 않게 먼 이웃도 배려하자는 제안을 굳이 좁은 공동체 너머의 더 넓은 세계를 지향하자는 논조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는 뜻이다. 

세계시민주의가 국가공동체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는 것도 중대한 문제다. 세계시민주의가 말하는 국가공동체가 자유시장주의자의 어법에 있는 '국익'이나 '국가경제'라는 용어와 쓰임새가 같은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업(소유자)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국가 전체의 이익으로 혼동시키는 어법을 말한다. H&M과 같은 초국가기업의 이익보다 그 브랜드의 청바지를 생산하는 방콕 공장의 노동환경이 더 중요하며 그러므로 한국에서 H&M 보이콧 운동을 조직하겠다면 이것은 매우 의미있는 주장이다. 만약 국가공동체를 극복하자는 세계시민주의의 이상이 현실적으로 이와 같은 사례와 맞닿아 있다면 그 주장을 하는 데 굳이 자유시장주의자의 어법을 가져다 쓸 필요는 없다. 잘못된 개념 사용은 우리가 세계시민주의의 주장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방해가 된다.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인간애를 발휘한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사람은 진정 세계시민주의자라 할 수 없는 것인가? 이 사람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데 세계시민주의를 고려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세계시민주의 자체가 '국가와 세계'라는 비현실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무의미한 대결구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가까운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한 후 생겨나는 마음가짐이 세계시민주의의 이상과 어긋날 이유는 없는데 말이다. 



한비야는 " “우리도 힘든데 왜 남의 나라를 돕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10년 만에 정말 많이 변했죠."라고 말했다.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도 힘든데 왜 남의 나라를 돕냐'는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학문적으로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그 답은 결코 세계시민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묻고 싶은 게 있다. "왜 남의 나라 힘든 문제를 우리가 힘든 문제와 연결지어 다함께 공감할 수 없는가?" 우리나라 사람만 불쌍히 여기는 '공감의 원근법'을 죄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공감의 거리를 넓히는 것 못지 않게 공감의 원근법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싶다. 남의 문제를 상상하고(인지하고) 그에 응답하는 일을 온전히 우리의 문제로 끌어안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권력의 폭력성과 기업의 이기심을 논하지 않고는 전혀 불가능한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한비야가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10년의 변화'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글로벌 리더와 세계무대에 대한 출세 지향적 관심을 제외시키고 과연 그 답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by ok_com

위 문장은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85세가 되던 해(2002년) 출간된 자신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 적은 마지막 구절이다. 앞 문장을 더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나는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워 보이는 미국이라는 세계제국을, 앞서 영국제국이 남긴 기록을 되돌아볼 때보다 더 무섭긴 하지만 시큰둥한 마음으로 내다본다. 영국은 나라가 적었기 때문에 그만큼 과대망상에 덜 빠졌다. 나는 시험에서 몇 점이나 받았을까. 점수가 낮으면 이 책은 앞으로 저자보다 대부분 더 오래 살게 될 독자들이 새로운 세기를 헤쳐 나가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 11월 손학규는 청와대 불법사찰에 대한 장외투쟁에 나서면서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자신의 각오를 밝힌 바 있다. 직접 홉스봄을 인용한 말이었다. 그리고는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피땀으로 이뤄냈듯이 좋은 세상은 그냥 오지 않는다. 잘못된 것과 맞서고 힘 있는 세력과 싸우고 무관심을 털어내야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옳은 말처럼 들린다.


세상에 옳은 말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옳은 말 중 어떤 것을 자신의 말로 하느냐가 중요할 때가 있다. 흠 없이 옳게 보이는 말도 때론 다른 이의 말을 가로막거나 몰아내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흔히 짧은 말이 길게 이어질수록 그런 본색은 잘 드러난다. 그러니 옳게 보이는 말이 간결한 단정조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은 전혀 옳게 기능할 수 없으며 오히려 매우 의심스러운 말이다. 말에 말 이상의 힘과 본색이 있는 이유는 당연하지만 말이 생각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완의 시대'의 마지막 말은 홉스봄의 전 생애가 담긴 것이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는 앞서 스러져간 젊은 시절 동지들을 애틋히 여겨 끝까지 영국 공산당원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는 저자의 고백도 담겨있다. 

전후의 말을 이어보면 홉스봄과 손학규의 좋은 세상, 무기, 사회 불의는 서로 다른 생각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공산당과 민주당은 본래 다른 것이고 그 차이는 정치학적으로 잘 분석되어있으니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패를 회고하는 노학자와 새 각오를 다지는 현직 의원이 같은 말을 통해 내비치는 태도의 차이는 분명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 분위기를 보면 지금 특히 그래야 할 때인 것 같다. 어쩌면 홉스봄을 인용한 손학규의 정변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진보세력은 생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세력에 자꾸만 말을 빼앗기고 있다. '노동자'라는 단어는 거의 모두 '시민'으로 대체되었다. 정치에서 말을 빼앗기는 것은 기회를 빼앗기는 것과 같다. 전에 없던 긴 암흑기가 올 수 있단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은 내가 목격한 대단한 해였다. 2012년은 더 대단할 것 같다. 

내가 여기에 성실한 자세와 탄탄한 논리, 매력적인 표현으로 '좋은 세상들'의 차이를 논하지 못한 것은 홉스봄이 적었듯 "더 무섭긴 하지만 시큰둥한 마음으로" 그동안 한국사회의 손학규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말보다 대중에 더 옳게 다가갈 말을 내놓아야 한다는 반성이 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이 너무 길게 이어질지라도 서로의 좋은 말이 한데 모아져야 최선의 옳은 말이 탄생하는 법이다. 이왕이면 다수에게 좋은 말이 많이 반영돼야 할 것이고. 

세상은 물론 말만으로 좋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을 통해 생각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중요하고 꼭 필요한 출발이다. 각자의 입장을 서로 밝히고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말을 명료하게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아주 기본된 제스처겠다. 정치인이라면 특히 더 그렇다. 아쉬운 점은 정치인 스스로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만을 말할 수 있을 뿐, 무엇을 말하고 있지 않은지는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말해지지 않은 내용을 지목하고 드러내는 것은 다른 자들의 몫이다. 뭐 그런 점에 있어서 위에서 손학규는 제 할 말을 대체로 다 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말을 둘러싼 남은 일들이야말로 정치의 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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